[칼럼] 사회 개혁 앞장 선 조선의 선비들
[칼럼] 사회 개혁 앞장 선 조선의 선비들
  • 배동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7.0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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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은 연산군 7년 (1501)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선생은 70세, 남명선생은 72세까지 장수했다. 퇴계가 경북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나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남 삼가현 토동에서 출생하여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사림의 영수다 16세기 학파형성기에 있어서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었다. 그들의 제자들은 동인으로 한 정파를 이루었다가 퇴계학파는 남인으로, 남명학파로 북인으로 분가됐다. 16세기는 사림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기성정치세력인 훈구파와의 대립 갈등 속에 사화가 계속 발생한 시기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예사림인 조광조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위한 대개혁을 추진하였지만 학문적 미성숙성과 과격성으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중앙정계에 다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한 흐름에 힘입어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은 1539년 39세에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로 인정받아 헌릉참봉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가 학자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대. 퇴계는 그 길을 걷게된 것임에 비하여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지식인의 길을 선택했다. 퇴계는 명종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전횡하는 혼란기를 당하여 계속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상경과 낙향을 반복하면서도 사대부의 길을 걸어왔다, 성균관 대사성, 양관 대제학 등 청직의 최고직과 각조 판서를 고루 역임하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학문이 토대가 된 율곡 이이에 의하여 조선에 토착화된 성리학은 시대사상으로서 가치관의 정립을 통하여 사회정의 구현의 이론적 기준을 마련하였다. 반면 남명은 지속적인 국가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재야의 우국지사로서 비판자 역할을 고수했다. 1554년 54세에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고하는 퇴계의 권유를 물리치고 처가가 있던 김해에 자리잡고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경의(敬義)에 근본을 둔 실천우선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퇴계가 조광조의 실패를 거울삼아 현실참여를 통하여 점진적인 개혁의 씨앗을 뿌리며 신정치세력인 사림의 입지를 다져놓아 다음 시대인 선조대에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는데 교두보를 놓았다면, 남명은 강직하고 굳센 기상의 재야 사림으로서 강렬한 비판의식으로 무장하고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정치의식이 지나치게 투철하여 현실정치판에 뛰어들지 못한 현실부적응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다 함께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이상 아래 교육에 기대를 걸고 새 시대를 준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퇴계나 남명은 다 함께 개인의 안위와 영달에 안주하지 않고 이상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강렬한 사회개혁 의지를 다지면서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학파가 모집단이 된 이념붕당들이 다음 시대에 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가게 되었던 바, 혼란의 시대인 오늘날을 보면 시사 하는바가 크다.

나아갈 때와 들어갈 때를 분명히 했던 퇴계 이황(1501~1570), 꿋꿋한 지조의 남명조식(1501~1572) 참된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받들만한 두 거유(巨儒)는 학문뿐 아니라 우선 말과 실천으로 세인들을 감복시켰다. 평생 초야에 은거한 남명은 “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하나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제제들에겐 벼슬에 나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군왕의 엄한 명령이 있을지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응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남명의 대쪽 같은 기개는 ‘단성현감’을 제수 받은 1555년 당시 임금인 명종과 문정왕후의 잘못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장계를 올린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대비(문정왕후)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일 뿐입니다”라며 무능한 왕권을 대놓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명종의 분노를 사 중벌이 예상됐어나 신하들의 간언으로 화를 면했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보는 것일까. 퇴계는 이런 남명에 대해 “조식은 고항지사(高抗之士)다. 풍진(風塵)중에서도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퇴계전서 권7)고 적었다. 벼슬에는 때가 있다는 생각은 퇴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남명과는 달리 관직 진출을 무조건 마다하지는 않았으나, 사직 상소를 수없이 올렸을 정도로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1552년 가을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현재의 국립대총장)으로 승진 했으나 선비들의 품행이 날로 흐트러져 교화하기 힘들자 또 주저없이 사직했다.

퇴계는 “만약 출처의 의를 돌아보지 않고 한갓 임금의 총애만을 중히 여기면, 이것은 군신간의 예의가 아니라 작록(爵祿) 일 뿐이다” 옳겠는가?”라며 스스로를 단속하고 경계했다. 조선의 선비로 동년배인 퇴계와 남명은 당대 최고의 문명(文名)을 날리던 학자였지만 지조. 신념하나로 사회개혁을 이끌어온 조선의 훌륭한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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